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무가베 (문단 편집) ==== 백인 탄압 ==== 사실 90년대까지 무가베는 백인과의 화합 정책을 펼쳤지만, 2000년 2월부터 무가베는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했으며 백인에 대한 공공연한 인종차별과 복수를 선동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독일, 더 나아가 유럽을 좀먹는 악마로 규정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을 일으킨 것 처럼,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것 처럼 무가베 역시 짐바브웨 내부의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적을 필요로 했다. 1980년대 초의 구크라훈디 대학살에서는 그 타깃이 은데벨레족이었고, 2000년대에는 백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앞서서 말했던 백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흑인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자 물론 백인들도 반발하여 민병대를 조직해서 대항했다.[* 참고로 이전까지는 백인 농장이 짐바브웨 노동력의 40% 이상을 고용했고, 독립 이전의 1978년 짐바브웨의 농업 생산의 90%를 백인 농장이 생산했다고 한다.] 이에 무가베는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해 백인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하며 집을 불태워서 나가게 만들었고, 심한 경우에는 반항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백인들에게서 빼앗은 농장은 1400만 헥타르에 달했으며, 이렇게 빼앗은 농장들은 무가베(15개), 부통령(13개) 등 고위층들에게 집중적으로 분배되었다. 이 유혈사태에는 여당의 열성당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제5여단 출신 군인들도 참여했으며, 심지어 구쿠라훈디 학살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페란스 시리 공군 사령관이 추가 군인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무가베에 우호적인 농장들은 습격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오히려 대법원에 보호를 신청한 농장들이 최우선적인 습격 대상이었다. 또한 당시 정보부는 아예 습격 대상 농장 리스트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가베는 "아프리카의 자원은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가 아닌 아프리카인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며 아프리카 국가들과 서구 유럽 국가들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기도 했다. 무가베 정부가 이러한 경찰과 민병대들의 학살을 방조하면서 1980년대 초반 무가베 집권 후 백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농장,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리하여 백인 민병대와 흑인 경찰과 폭력배 간의 무수히 많은 유혈 사태들이 발생했다. 증언에 의하면 백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가서 나중에 풀려나서 국외 추방될 때까지 강제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호명되는 사람들은 무자비한 채찍질을 당했고 흑인들은 인종정화를 명목으로 백인 처녀들과 소녀들을 강간하고 임신시켜 흑백 혼혈아를 출산시켰다. 실제로 2006년까지 60명의 백인 농부들이 흑인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2000년 3월에 짐바브웨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흑인들의 토지 침공이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리자,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사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대법원장을 포함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판사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판사들을 앉힌 후 2001년 11월에는 '짐바브웨에서 거의 모든 백인 소유 농장을 보상 없이 몰수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대통령령을 발표했다. 결국 짐바브웨의 백인들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탈출하기 시작하여 짐바브웨는 백인들이 급격히 감소해 1980년 당시까지 남아있던 백인 중 25–30만 명이 짐바브웨를 떠나고 5만 명의 백인만 남게 되었으며, 20년이 지난 현재 짐바브웨에 백인들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면서 무가베는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흑인 100퍼센트에 가까운 국가가 되었다''', '''백인 농장을 모두 환수할 때 비로소 혁명이 완수되는 것'''이라는 망언을 남기면서 만족했고, '참전군인들'[* 정작 이들 중 진짜 '참전군인'들은 15–20% 정도였고, 나머지 대다수는 무가베가 동원한 젊은이들, 즉 상술한 '국립 청소년 서비스 캠프' 출신의 민병대들이었다.]이 백인 농부들의 토지를 폭력으로 강탈한 것을 옹호했다. 심지어 이 '토지 개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오히려 백인 농장주가 아닌 백인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동자들이었는데, 실제로 이 유혈 사태의 영향으로 짐바브웨에서는 백인 농장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합해 총 2백만 명이 무일푼이 되어 그 중 40만 명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